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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축복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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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천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9-1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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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이란 무슨 뜻일까

1. 축복의 오해와 본래 의미

우리는 살아가며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자주 주고받는다. 그것은 따뜻한 말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의미는 모호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장수와 건강이 복이고, 어떤 이에게는 부와 성공이 복이다. 서양에서 “God bless you”라는 말이 재채기 뒤의 습관적인 인사로 굳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축복은 사람들의 바람을 담는 그릇처럼 쓰였지만, 정작 하나님이 말씀하신 축복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성경 속에서 축복은 언제나 관계와 연결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피조 세계와의 관계.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고 말씀하시며, 그 복이 단순히 아브라함 개인의 번영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 것이라고 밝히신다(창 12:3).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누리는 은혜가 이웃에게, 더 나아가 온 세상에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의 본래 성격이다.

2. 유대교의 브라카(בְּרָכָה) – 하나님 임재를 부르는 언어

유대인들의 기도문은 거의 모두 “Blessed are You, O Lord our God, King of the Universe…”로 시작한다. 히브리어로 축복을 뜻하는 브라카(berakhah)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임재를 삶의 한가운데로 초대하는 말이다. 식사 전에도, 여행을 떠날 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순간을 축복으로 바꾼다.

유대교의 이 전통은 인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인간이 만든 우상이나 자연 신격화에서 벗어나, 초월적이며 형상 없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직시하게 되었고, 회개와 순종으로 돌아오라는 선지자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는 말씀은 그 핵심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유대교는 동시에 큰 한계를 드러냈다. 하나님의 복을 자기 민족만의 전유물로 이해하며, 다른 민족을 이방인으로 배제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종교와 정치가 긴밀히 결합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왕과 제사장에 의해 권력 유지의 도구가 되었다. 신의 뜻을 외치던 선지자들의 목소리는 체제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용되었고,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는 샬롬의 언어가 억압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쓰이기도 했다.

3. 기독교의 God Bless – 은혜와 동행의 선언

기독교에서 “God Bless”는 단순한 덕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선언이며, 그분의 임재 속에 살아가라는 초청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이 의미를 잘 드러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태복음 5:3, 9).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은 재산이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 곧 샬롬의 삶이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를 거치며 이 복음을 놓쳤다. 십자군 전쟁의 깃발에는 “Deus Vult”(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이름을 내세운 정복이었다. 중세 종교재판에서 “하나님 영광”이라는 명분은 오히려 폭력과 두려움의 언어였다. 신대륙의 식민지 개척과 강압적 선교도 “God Bless”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은혜와 평화의 복은 그렇게 세속 권력과 뒤섞이며 흐려졌다.

4. 이슬람의 살람(سلام)과 바라카(بركة) – 평화와 은혜

아랍어 살람은 히브리어 샬롬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 무슬림의 인사말 “As-salamu Alaikum”(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은 곧 하나님의 평화가 삶 속에 깃들기를 바라는 축복이다. 또 바라카(baraka)는 하나님의 은총과 영적 힘을 의미한다. 이슬람의 본래 정신 속에서도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평화와 직결된다.

그러나 이 전통도 역사 속에서는 왜곡되었다. 이슬람의 빠른 확장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무력 충돌의 명분으로 쓰였다. 내적 분열(수니파와 시아파)도 같은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축복과 평화의 언어가 종종 폭력의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5. 샬롬 – 온전한 평화

성경에서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될 때 주어지는 전인적 평화다. 인간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든 균형이 바로 서는 것이다. 민수기 6장의 제사장 축복은 이를 잘 표현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수기 6:24–26)

샬롬은 눈에 보이는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임재 안에서의 온전함이다.

6. 예수의 길 – 용서와 순종으로 열리는 축복

예수께서는 축복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셨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2)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 기도하셨다.

예수의 길은 힘으로 맞서는 길이 아니라, 용서와 순종으로 하나님의 샬롬을 드러내는 길이었다. 그분이 보여주신 “God Bless”는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자체였다.

7. 종교의 왜곡과 위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하나님을 고백했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권력과 욕망의 도구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 유대교는 “선민의식”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이방인을 배제했고,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보듯 지금도 그 그림자는 진행형이다.

  • 이슬람은 평화의 언어를 내세우면서도 종종 폭력과 전쟁의 도구로 사용했다.

  • 기독교는 사랑의 복음을 들고도 십자군, 식민지 선교, 제국주의와 결탁하는 길을 걸었다.  

이렇게 세 종교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위선을 저지른 것이다.

8. 목회적 성찰: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의 축복

오늘날도 “God Bless America”라는 구호는 정치적 집회에서 쉽게 들린다. 하지만 그 속뜻은 종종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국가적 이익과 힘의 과시로 읽힌다. 교회 안에서도 “축복합니다”라는 말은 때때로 사업 번창, 건강 유지, 자녀 성공을 빌어주는 수준으로만 사용된다.

목회자로서 성도들과 삶을 나누다 보면, 누군가 “목사님, 저 정말 복 좀 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마음속에 담긴 것은 대개 물질적 형통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다르다. 눈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느끼는 것, 실패 속에서도 그분의 평강이 지켜주시는 것, 이것이 참된 축복이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7)라고 고백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9. 결론: 왜곡된 종교를 넘어, 순수한 샬롬으로

유대교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간의 죄악을 직시하게 한 점은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 외침은 권력에 의해 도구화되었고, 기독교와 이슬람도 같은 길을 걸었다.

예수께서는 그 길에서 벗어나셨다. 그는 폭력을 거부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시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순종으로 샬롬을 드러내셨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며, 그분 안에서 누리는 평화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 제도의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탈종교화된 신앙이다. 교권과 제도가 아닌,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동행과 평화 그 자체에 집중하는 신앙. 바로 이것이 이 책이 담으려는 본래의 의미다.

“God Bless”와 “샬롬”은 더 이상 위선적 구호가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의 초대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보여주신 길, 곧 용서와 순종, 사랑과 샬롬의 삶을 따라가는 데서만 완성된다.

세속화되고 종교화된 껍질을 벗기고, 순수한 예수 신앙의 공동체가 태어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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